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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뇌르마르크와 아네르스 포그 옌센의 『가짜 노동』은 제목만 보면 유머처럼 느껴지지만, 책을 펼치면 바로 지금 우리가 겪는 일터의 현실이 스치며 이상하리만큼 낯익은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회의, 형식만 남은 보고서, 누구를 위한지 모르는 목표 설정, 그리고 바쁜데도 성과는 없는 하루. 이 책은 이런 상황을 가볍게 다루지 않습니다. 대신 아주 일상적인 예를 통해, 우리가 왜 이렇게 지쳤는지 조용하게 짚어줍니다. 읽다 보면 마음이 두 번쯤 흔들립니다. 한 번은 ‘내가 하는 일이 혹시 정말 아무 의미가 없는 건 아닐까’ 하는 고민이 올라올 때고, 또 한 번은 ‘나만 이런 게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이 스칠 때입니다. 두 저자는 전문가의 시선이 아니라 일터를 살아낸 사람의 언어로 이야기를 이어가며, 우리가 놓쳐온 감각을 천천히 드러냅니다. 마지막 문장을 따라가면 어느새 작은 숨이 트이는 느낌이 남습니다.

의미 없는 일이 늘어나는 이유

저자들은 오늘의 일터가 ‘바쁘게 보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구조로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누군가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부서를 부각시키기 위해, 혹은 일을 한다는 느낌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과제들이 계속 만들어집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실제 업무보다 문서 작성과 증빙에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되죠.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자료를 다시 정리하고, 그 보고서를 설명하기 위한 회의가 만들어지고, 그 회의를 위한 사전 준비가 또 이어집니다. 이상하게도 할 일은 많지만 결과는 흐릿합니다. 저자들은 이 상황을 ‘성과의 그림자’를 쫓는 구조라고 말합니다. 실제 일보다 ‘일을 했다는 흔적’이 중요해진 것이죠. 이런 방식은 사람들의 에너지를 빠르게 소모시키고, 동시에 ‘왜 이 일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흐리게 만듭니다. 결국 사람들은 좋아하는 업무보다 구조가 요구하는 과제에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되고, 마음속 피로가 조금씩 쌓입니다. 그 피로는 어느 순간 무기력으로 이어지고, 일터의 분위기도 함께 무거워집니다.

바쁜데도 성과가 없는 하루의 구조

『가짜 노동』에서 가장 공감되는 부분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하루 대부분을 ‘보조 업무’에 쓴다는 지적입니다. 중요한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마다 다른 업무가 끼어들고, 그 흐름이 끊어지면서 에너지가 새어나갑니다. 저자들은 이 현상을 ‘업무의 파편화’라고 설명합니다. 일이 잘게 쪼개진 탓에 집중할 시간이 줄어들고, 사람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작은 일들에 매달리다가 하루가 지나갑니다. 이 구조는 바쁜데도 아무것도 이룬 것 같지 않은 감정을 남깁니다. 그 감정은 자기 효능감을 떨어뜨리고, 다시 일하기 어려운 상태를 만듭니다. 저자들은 이를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 구조에서 비롯된 시스템적 문제로 봅니다. 업무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형태로 바뀌어버린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일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먼저 ‘무엇을 버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중요한 일에 집중하는 문화가 사라지면 결국 모두가 지치기 때문입니다.

가짜 노동을 줄이고 업무 집중을 되찾는 미니멀 사무 공간

업무를 다시 의미 있게 만드는 방법

두 저자는 안정적인 조직일수록 불필요한 절차가 늘어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리를 지키기 위해 일을 만들고, 그 일이 다시 다른 사람의 시간을 갉아먹습니다. 이런 구조가 반복되면 결국 조직 전체가 무거워지고, 아무도 문제를 직접 말하지 않는 분위기가 자리 잡습니다. 저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건 ‘단순화의 용기’라고 설명합니다. 회의를 줄이고, 문서를 줄이고, 협업 절차를 줄이는 일. 겉보기엔 단순해 보이지만, 조직에서는 생각보다 큰 결심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단순화가 이루어지는 순간 사람들의 마음이 훨씬 가벼워집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일의 목적’을 다시 확인하는 일입니다. 왜 이 일을 하는지, 이 과정이 꼭 필요한지, 어떤 결과가 의미가 있는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순간 가짜 노동은 자연스럽게 줄어듭니다. 저자들은 이를 업무가 아니라 ‘사람 중심의 구조’라고 설명합니다. 결국 사람의 시간을 되찾는 일이 조직을 건강하게 만드는 출발점이라는 뜻이죠.

피로를 줄이는 가장 현실적인 변화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들은 일터에서 피로를 줄이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일의 흐름을 ‘사람의 리듬’에 맞추는 일입니다. 업무를 몰아서 처리하는 시간, 방해받지 않는 시간, 회의를 배치하는 방식, 메시지를 확인하는 간격 등 작은 변화가 사람의 에너지를 크게 바꿉니다. 그들은 특히 ‘집중을 방해하지 않는 문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메시지에 즉각 답을 요구하는 문화, 불필요한 회의, 모두가 모두를 바쁘게 만드는 구조는 피로를 빠르게 쌓습니다. 반대로 각자의 시간을 존중하는 흐름은 조직의 속도를 느리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집중력이 올라가 전체적인 효율은 더 좋아진다고 말합니다. 책을 덮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 질문은 하루의 작은 변화를 이끌어냅니다.

의미 있는 일로 하루를 다시 채우기

『가짜 노동』은 단순한 업무 비판서가 아닙니다. 사람의 시간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 의미 있는 하루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책입니다. 저자들은 우리가 지쳐 있는 이유가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에너지를 갉아먹는 구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변화는 개인에게서만 시작되지 않습니다. 일의 목적을 다시 확인하고, 필요 없는 절차를 줄이고, 관계 속에서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는 흐름이 함께 만들어져야 합니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이런 문장이 남습니다. “일은 삶을 지치게 하지 않아야 한다.” 거창한 메시지가 아니지만, 마음에 오래 머무르는 문장입니다. 바쁜 하루 속에서도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 다시 묻는 순간, 의미 없는 일들로 채워진 공간이 조금씩 비워지고, 그 자리엔 ‘나에게 필요한 일’이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하루의 무게는 조금씩 바뀝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