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기술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대체하는 시대, 우리는 여전히 인간다움의 본질을 정의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김영하 작가의 장편소설 『작별인사』는 이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인공지능, 휴머노이드, 두뇌 이식 등 기술적 상상을 배경으로 하되 인간 존재의 정체성과 감정 그리고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SF적 상상력 속에서 철학적 사유로 독자를 이끕니다. 『살인자의 기억법』 이후 8년 만에 발표된 이 장편은 기술과 인간이 서로 얽히는 미래 사회 속에서 ‘사람다움’의 본질을 되묻는 의미 있는 문학적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인간인가, 인공지능인가, 두뇌이식 후의 ‘나’는 누구인가
『작별인사』는 한 소년이 테러로 부모를 잃고 생명을 연장하는 방식으로 두뇌를 인공지능 기반 신체에 이식받으며 시작됩니다. 주인공 알렉스는 과거의 기억을 일부 잃은 채 깨어나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 앞에 선 채 이야기의 중심에 놓입니다. 이 소설은 그저 과학기술의 발전이 불러온 이야기로 시작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인간 존재의 정체성이라는 철학적 질문을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알렉스는 인간의 두뇌를 가지고 있지만 신체는 완전히 기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는 본래 자신이 누구였는지 무엇을 좋아했는지를 잊어버렸으며 주변 인물들조차 그를 이전과 동일한 존재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설정은 ‘인간다움’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강하게 묻는 장치로 작용합니다. 인간을 규정짓는 요소가 단순히 육체인지, 감정인지 아니면 기억과 자아의 연속성인지 독자는 끊임없이 생각하게 됩니다. 알렉스는 주변 인물들로부터 “너는 기계야”라는 말을 듣지만 그는 여전히 고통을 느끼고 생각하며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합니다. 이 모습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단지 유기적 신체로만 환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오히려 인간성을 구성하는 본질은 정신적 작용,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영하 작가는 알렉스를 경계에 선 인물로 제시하면서 독자가 ‘나는 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타인이 보는 나와 내가 인식하는 나 사이의 간극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알렉스의 여정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고독하고도 치열한 탐색의 과정이며 이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 자신 역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작별인사』는 첨단 기술의 언어를 빌려오되 인간 본연의 문제를 치열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단순한 SF 소설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억, 감정, 그리고 관계, 인간다움의 조건에 대한 새로운 질문
알렉스는 육체는 기계지만 사고 능력과 감정은 인간에 가깝습니다. 그는 기억을 상실한 채 깨어나지만 점차 자신에게 남아 있는 잔재들을 통해 감정을 경험하고 과거의 단편들을 떠올리며 혼란 속에서 자기 자신을 다시 구성하려 노력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외로움, 두려움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경험하게 되며 자신이 단순한 기계가 아님을 확신하기 시작합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인간다움이란 유전자나 생물학적 조건이 아니라 기억과 감정 그리고 관계 속에서 구현되는 복합적인 개념임을 제시합니다. 알렉스가 느끼는 감정은 프로그래밍된 결과가 아닌 체험에서 비롯된 응답입니다. 그는 과거의 가족을 그리워하며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진심 어린 애정을 느끼고 때로는 상실의 고통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반응은 인간이 지닌 감정의 본질 즉 감정이 단지 화학적 작용이 아닌 사회적, 정서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는 것임을 암시합니다. 특히 알렉스는 자신의 감정을 ‘의심하고’, ‘검증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통해 점점 더 인간에 가까운 존재로 변모합니다. 김영하 작가는 알렉스를 통해 인간이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자아를 완성해가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인간다움은 고립된 인식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들과 관계를 맺으려는 의지 속에서 피어납니다. 알렉스는 스스로를 믿고 타인과의 감정적 교류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가며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갑니다. 독자는 이 여정을 통해 인간 존재를 다시 바라보게 되며 진정한 감정과 관계의 가치를 되새기게 됩니다. 이처럼 『작별인사』는 SF적 세계관 안에서 감정이라는 정서적 요소를 섬세하게 다뤄,인간과 인공지능의 경계를 허물며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재정의를 시도합니다.
기술이 만들어낸 미래, 그러나 여전히 인간적인 이야기
소설의 배경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을 상당 부분 대체하고 인간의 두뇌가 기계화될 수 있는 미래입니다. 이 미래는 냉혹하게 효율과 속도를 따지는 사회로 묘사되며 사람들의 감정은 점차 기술 뒤로 밀려나고 정체성과 공동체의 의미는 희미해져 갑니다. 그러나 『작별인사』는 그런 차가운 세계 속에서도 따뜻한 감정과 인간다움이 살아남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알렉스는 기계로 태어났지만 그 누구보다 인간적인 고민을 하며 점점 인간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이처럼 기술적 진보 속에서도 인간이 지녀야 할 가치 즉 공감, 애정,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작가의 시선은 냉정한 미래 예측을 넘어 따뜻한 윤리적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작품 속 기술은 인간을 보완하거나 대체할 수는 있지만 그 기술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특히 알렉스의 내면 독백과 인간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는 기계와 인간 사이의 경계가 단순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겉으로는 기술 문명이 모든 것을 장악한 사회처럼 보이지만 결국 이 사회를 살아가는 것은 감정을 지닌 개인들이며 이들의 이야기가 바로 『작별인사』의 중심이 됩니다. 김영하 작가는 기술의 발전에 따른 사회 변화를 예리하게 짚어내되 그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끝까지 붙잡고 고민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이 단순한 미래소설이나 테크놀로지 소설이 아니라 철학적 문학으로 평가받는 이유입니다. 기술이 세상을 바꾼다 해도 인간은 여전히 감정으로 살아가고 관계를 통해 성장하며 질문을 던지는 존재임을 작가는 조용한 문장 속에서 이야기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김영하의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질문
『작별인사』는 김영하 작가가 문학을 통해 끊임없이 던져온 인간 존재에 대한 탐색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그는 기억과 정체성을 파고들었고 『작별인사』에서는 기술과 인간성 사이의 경계를 더 첨예하게 질문합니다. 이 작품은 인간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습니다. 혈육인가? DNA인가? 아니면 마음과 감정,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자아인가? 김영하는 독자에게 어떤 정답을 제시하지 않지만 질문 자체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알렉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의 감정은 진짜인가’, ‘기억이 지워진 나도 여전히 나인가’ 같은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작가는 말합니다. 인간은 기억하는 존재이며 관계를 맺고 감정을 느끼는 존재라고. 그리고 이 세 가지 조건이 사라지는 순간 인간다움 역시 사라진다고 경고합니다. 『작별인사』는 기술이 모든 것을 정의하려는 시대에 오히려 정의할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이 여전히 존재함을 일깨우며 그 경이로움을 되새기게 합니다. 결국 『작별인사』는 기술과 인간 사이에 놓인 낯선 공간을 탐색하는 여정이며 그 끝에서 우리는 더 깊이 있는 인간 이해에 도달하게 됩니다. 김영하의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감정의 깊이를 담고 있으며 조용한 서사 속에서도 날카로운 통찰을 잃지 않습니다. 독자는 책을 덮는 순간 자신의 존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이 작품이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묵직한 작별 인사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