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우리를 저버릴 수 있어도 우리는 끝까지 살아남는다.” 이민진 작가의 장편소설 『파친코』는 한 가족의 4대에 걸친 삶을 통해 근현대 동아시아의 정치·사회적 격랑 속에서 잊히고 외면받아온 ‘재일조선인’의 삶을 치열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단순한 이민 서사나 가족 드라마에 머물지 않고 소속되지 못한 자들이 겪는 차별, 정체성의 혼란 그리고 인간의 존엄에 대한 이야기를 밀도 있게 풀어냅니다. 정교한 인물 구성과 서사 구조, 시대적 맥락을 아우르는 섬세한 문장력은 독자를 장대한 시간의 흐름 속으로 이끕니다. 『파친코』는 무엇보다 ‘기록되지 않은 이들의 삶에도 서사와 가치가 있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는 소설입니다.

차별 속에서 피어난 삶, ‘선자’로 대표되는 여성의 강인한 생존 서사
『파친코』는 부산 영도에서 가난한 어부의 딸로 태어난 ‘선자’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난과 차별에 익숙했던 선자는 열일곱 살에 일본인 아버지를 둔 조선인 남자 ‘한수’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와의 관계에서 임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선자는 도쿄로 이주하는 목사 ‘백이삭’과의 결혼을 선택하며 일본으로 떠나게 됩니다. 이후 그녀는 낯선 땅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억압받는 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선자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으며 자식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여성으로서 이방인으로서 감당해야 했던 수많은 고통과 희생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파친코 가게 운영이라는 수단을 통해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지만 그 과정에서 여전히 ‘조선인 여성’이라는 낙인과 무시를 견뎌야만 합니다. 그러나 선자는 단 한 번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일상은 조용하지만 굳건하게 지속되며 이는 전쟁과 식민지, 해방과 분단, 고도 성장과 같은 거대한 역사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삶의 의지를 대변합니다. 이처럼 선자는 『파친코』의 핵심 서사를 이끄는 인물로서 여성의 강인함과 존엄 그리고 이민자 정체성의 이중적 억압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작가는 선자의 삶을 통해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이름 없는 여성’의 삶에 빛을 비추며 독자로 하여금 묵직한 감동과 연대를 느끼게 만듭니다. 선자의 존재는 단순한 소설 속 인물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낸 수많은 한국 여성들의 대변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체성의 경계에서, 재일조선인의 삶과 이름 없는 이들의 역사
『파친코』는 단순히 한 가족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20세기 한일 관계와 재일조선인의 삶을 정면으로 다루는 드문 영문 장편소설입니다. 소설 속 인물들은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합니다. 일본인 사회는 그들을 이방인으로 취급하고 한국 역시 이들을 ‘외부의 사람’으로만 바라보는 이중적인 시선을 가집니다. 이처럼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재일조선인의 삶은 ‘무국적’과 ‘무이름’의 삶을 강요받는 과정이었습니다. 주인공 선자의 아들 ‘노아’는 이러한 정체성의 경계에서 가장 극단적인 고통을 겪는 인물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 노력하지만 혈통과 이름이 허락하지 않는 사회적 장벽 앞에서 좌절하고 끝내 비극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반면 동생 ‘모자수’는 조선인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사회적 편견을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이러한 대조는 단순한 형제 간의 갈등을 넘어 재일조선인들이 살아온 다양한 전략과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서사적 장치입니다. 『파친코』는 독자에게 “당신은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정체성의 불확실성과 그로 인한 삶의 무게를 직접적으로 체감하게 합니다. 특히 작가는 ‘이름’과 ‘출신’이라는 요소가 얼마나 무거운 사회적 낙인이 될 수 있는지를 반복적으로 강조하며 차별이 개인에게 어떤 상흔을 남기는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는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전 세계에서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이민자, 난민, 소수자의 삶에 대한 통찰로 이어집니다. 『파친코』는 잊힌 역사와 목소리를 문학이라는 형식을 통해 복원하며 독자에게 역사적 공감과 윤리적 성찰을 동시에 요구하는 소설입니다.
파친코라는 상징, 운명, 생존 그리고 가족의 유산
작품의 제목인 ‘파친코’는 일본의 대중 오락이자 사행성 게임을 의미합니다. 소설 속에서 이 단어는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불확실하고 불공정한 삶의 은유로 기능합니다. 파친코 기계에 구슬을 넣는 순간 공은 의도와 상관없이 튕기며 내려가고 결과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재일조선인의 삶 역시 그러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려 해도 차별과 편견, 사회적 장벽은 그들을 쉽게 성공하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선자와 그녀의 후손들이 파친코 업계에 종사하는 것은 단지 현실적 선택이 아니라 억압된 조건 속에서도 가족을 지키고 생존을 이어가는 하나의 전략이었습니다. 또한 파친코는 가족 간 세대 간의 연결고리이자 단절의 상징으로도 읽힙니다. 선자가 시작한 삶의 방식은 자식에게 유산처럼 이어지지만 각 세대는 이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어떤 이는 수치로 여겼고 어떤 이는 자부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처럼 『파친코』는 물려받은 조건 속에서도 각자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는지를 조명하며 궁극적으로는 생존을 넘어 ‘존엄한 삶’에 대한 의지를 드러냅니다. 작가는 “모든 인생은 무작위적이고 불공정한 파친코 게임과도 같다”는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그 안에서 각자가 만들어낸 의미와 가치에 주목합니다. 이는 운명을 받아들이되 그 안에서도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태도에 대한 깊은 존중이며 동시에 무너진 세계 속에서도 자신만의 삶을 일궈낸 이들의 찬사이기도 합니다. 『파친코』는 그래서 가족의 서사이자 동시에 시대를 살아낸 모든 사람들의 초상이 됩니다.
파친코는 여전히 쓰이고 있는 역사입니다
『파친코』는 역사책에는 남지 않았지만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삶들을 문학의 형식으로 기록한 작품입니다. 이민진 작가는 재일조선인이라는 낯설고도 중요한 주제를 통해 독자에게 삶의 조건과 정체성, 가족 그리고 차별이라는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듭니다. 『파친코』는 단순한 소설이 아닌 아직도 완결되지 않은 역사이며 우리가 끝까지 기억해야 할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