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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를 발로 차다, 작고 조용한 고백으로 쓰인 연대와 회복의 서사

by 2daizy 2025. 6. 11.

가끔은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늦게서야 깨닫습니다. 최은영 작가의 소설집 『비둘기를 발로 차다』는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감정, 쉽게 잊히지 않는 상처 그리고 회복이라는 주제를 조용하지만 강한 문장들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이 책은 표제작을 포함한 일곱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가 저마다의 고통과 분노, 애정을 간직한 인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여성, 약자, 소수자라는 존재를 중심에 둔 이 이야기들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개인 내면의 흔들림을 동시에 포착하면서 연대와 이해 그리고 책임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습니다. 삶의 가장 민감한 지점을 건드리면서도 감정에 함몰되지 않는 절제된 서사는 독자에게 묵직한 여운을 남깁니다.

최은영의 비둘기를 발로차다

표제작 「비둘기를 발로 차다」 죄책감과 책임 사이에서 흔들리는 내면의 기록

소설집의 표제작 「비둘기를 발로 차다」는 대학 동아리 내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과 그로 인해 형성된 권력 구조, 침묵, 방조에 대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제3자의 위치에 있었던 ‘나’의 시점에서 전개됩니다. 주인공은 사건 당시 ‘정확히 알지 못했다’는 이유로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피해자의 침묵을 이해하지 못하며 무심히 그 곁을 떠났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 그는 여전히 그날의 사건을 마음속에 품은 채 살아갑니다. 피해자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며 과거의 자신의 무지와 방관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한 ‘2차 가해’의 흔적을 되짚게 되는 것입니다. 작가는 이 과정을 통해 한 개인이 기억하고 책임지는 방식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비둘기를 발로 차다」는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도식 속에 갇히지 않고 그 사이에서 방조했던 자들이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탐색합니다. 우리는 때로 자신이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니었다는 이유로 침묵을 선택하지만 그 침묵조차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최은영은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외면하고 지나친 순간들이 누군가에게 얼마나 무거운 시간이었는가”를 성찰하게 하며 독자에게 책임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다시금 느끼게 합니다. 이처럼 표제작은 죄책감, 후회, 책임이라는 감정들을 차분하게 풀어내며 상처 입은 타인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깊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야기 너머의 여성들 -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들을 향한 귀 기울임

소설집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은 각자 다른 배경과 상황 속에서 살아가지만 공통적으로 외부의 억압과 내면의 상처를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에서는 소위 ‘투명인간’처럼 취급받던 여성 노동자의 분노와 외로움이 담겨 있고 「나의 작은 흑역사」에서는 어린 시절의 가해자이자 피해자로서 성장한 한 여성의 복잡한 감정 구조가 드러납니다. 이들 작품은 피해를 직접적으로 묘사하거나 극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일상 속에 잠재된 폭력과 차별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여성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작가는 여성들 사이의 연대와 이해 그리고 거리감에 대해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같은 상처를 공유한다고 해서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오히려 비슷한 상처가 서로를 더 날카롭게 찌르게 되는 경우도 있는 걸까요? 이러한 질문은 독자 스스로도 자기 경험을 반추하게 만듭니다. 여성의 목소리가 자주 삭제되거나 왜곡되는 사회에서 최은영은 그녀들의 이야기를 가장 진중하고 조용한 언어로 되살립니다. 특히 그녀의 문장은 독자가 인물들의 감정과 경험에 깊이 공감하게 만들며 독서라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경청’이 되도록 이끕니다. 이처럼 『비둘기를 발로 차다』는 사회 구조 안에서 쉽게 묵살되고 소외되던 여성 인물들에게 서사의 중심을 돌려줌으로써 우리가 외면해온 목소리들을 향해 정직하게 귀 기울이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소설을 통해 회복을 말한다는 것 - 조심스러우면서도 단단한 문장의 힘

최은영 작가의 소설은 단지 상처와 고통을 묘사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상처를 어떻게 견디고 어떻게 회복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작가의 진심 어린 태도가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회복이라는 개념은 이 책에서 거창하거나 눈에 띄는 변화가 아니라 조용히 이어지는 삶의 흐름 속에서 아주 작게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 「봄의 정류장」에서는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는 두 여성이 잠시 스쳐 지나가는 관계를 통해 서로에게 작은 위안을 건넵니다. 이때 작가는 이들의 만남을 극적이지 않게 묘사함으로써 회복이란 결국 거창한 사건이 아닌 ‘사소한 연결’에서 시작된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또한 전체 작품을 관통하는 작가의 문장은 매우 절제되어 있으며 감정을 억지로 끌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차분하게 서술되는 감정은 더 큰 울림을 남기며 독자에게 생각할 여백을 남깁니다. 이는 회복을 ‘설명’하기보다는 ‘함께 겪도록’ 만드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가가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고 다만 ‘있었다’고 조용히 말하는 이 진술은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더 깊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힘이 됩니다. 『비둘기를 발로 차다』는 그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상처 앞에서 얼마나 조심스러웠는가?” 그리고 동시에 답합니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억해주는 일만으로도 우리는 조금씩 나아갈 수 있다”고. 이런 면에서 이 소설집은 단순한 피해 서사가 아니라 상처를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작품이자 회복을 말하는 문학으로 읽힙니다.

당신의 침묵은 누구에게 상처였습니까?

『비둘기를 발로 차다』는 한국 사회에서 반복되어 온 젠더 권력, 사회적 침묵, 무지로 인한 방조를 되짚으며 우리 각자가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문학입니다. 최은영 작가는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그 사이의 수많은 이들을 조명하며 책임과 연대 그리고 조심스러운 회복의 언어를 담담하게 풀어냅니다. 이 소설집은 침묵과 외면이 얼마나 쉽게 상처가 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동시에 우리가 서로에게 더 좋은 증인이 될 수 있음을 조용히 일러줍니다.